“心不在焉 視而不見 聽而不聞 食而不知其味”
마음에 있지 아니하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고, 먹어도 그 맛을 알지 못한다.
— 《大學》 正心章
정보처리 책에서 불교를 보다
“수많은 데이터 중에서 나에게 의미가 있는 것들이 내 마음속에 들어오는 것이고 그것이 ‘정보’이다.”
그리고 바로 위에 《대학》 정심장의 구절이 인용되어 있었다. 마음에 있지 아니하면, 보아도 보이지 않는다고.
교과서적인 설명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여기서 “아, 데이터와 정보는 다르구나” 하고 넘어갈 것이다.
그런데 나는 거기서 유식사상(唯識思想)을 봤다.
1,500년 전의 정보 이론
유식(唯識)은 4~5세기 인도의 무착(無著)과 세친(世親)이 체계화한 불교 철학이다. 핵심 명제는 단순하다: “식(識)만 있고 경(境, 대상 세계)은 없다.” 우리가 인식하는 모든 것은 마음의 작용이라는 것이다.
유식은 인간의 인식을 여덟 단계로 나눈다.
- 전오식(前五識) — 눈, 귀, 코, 혀, 몸이 받아들이는 감각 데이터. 그냥 raw data다.
- 제6 의식(意識) — 감각 데이터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고 작용. 여기서 비로소 데이터가 “정보”가 된다.
- 제7 말나식(末那識) — “나에게” 의미가 있는지를 판단하는 자기참조 필터. 교재가 말한 “나의 경험적, 상황맥락적 기준”이 바로 이것이다.
- 제8 아뢰야식(阿賴耶識) — 모든 경험의 씨앗(種子)이 저장된 의식의 가장 깊은 층. 프로이트가 무의식을 발견하기 1,500년 전에 이미 존재한 개념이다.
정보처리 교재가 “데이터가 나에게 의미 있을 때 정보가 된다”고 한 것, 그것이 유식이 1,500년 전에 이미 팔식 체계로 정밀하게 서술한 내용이었다.
깃발은 왜 흔들리는가
유식을 공부하다 보면 반드시 만나는 장면이 있다. 육조 혜능(六祖 慧能)의 풍번논쟁(風幡論爭)이다.
두 스님이 깃발을 보며 논쟁했다. 한 스님은 “깃발이 움직인다”고 했고, 다른 스님은 “바람이 움직인다”고 했다. 혜능이 말했다.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라, 그대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다.”
도올 김용옥 선생은 이 순간을 용수(龍樹)의 중론(中論)에서 유식(唯識)으로 넘어가는 철학사적 도약점이라고 해석한다. 중론은 “바람이 분다”에서 바람과 붐을 분리할 수 없다고 본다 — 주어와 술어의 분별은 방편일 뿐이라고. 하지만 혜능이 그 사태마저 마음의 작용으로 본 순간, 유식으로 발전한다.
정보처리 교재의 “정보”도 같은 구조다. 데이터(깃발)는 그냥 거기 있다. 그것을 “정보”로 만드는 것은 —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 마음(識)의 작용이다.
관련 없어 보이는 것들의 관련
사실 이런 경험이 처음은 아니다. 전혀 관련 없어 보이는 것들에서 같은 패턴을 발견하는 일이 반복되어 왔다.
끈 이론과 유식학. 둘 다 “겉으로 드러난 현상은 더 깊은 패턴의 결과”라고 본다. 끈 이론에선 (직접 보이지 않는) 진동 양식이 입자의 성질을 만들고, 유식에선 아뢰야식에 심긴 종자(種子)가 경험의 색을 만든다. 하나는 수학으로, 하나는 수행으로 그 층을 더듬어 간다.
프로그래밍과 수행. 디버깅은 “문제 파악 → 원인 추적 → 수정 → 재발 방지”다. 불교는 이런 과정을 네 단계로 말한다(사성제).
- 문제를 그대로 본다 (고)
- 원인을 찾는다 (집)
- 해결한다 (멸)
- 다시 안 생기게 습관을 만든다 (도)
추상화는 복잡한 걸 “이름”으로 묶는 일이다. 그 이름은 편의일 뿐이라서, 내부는 계속 바뀐다(리팩토링). 불교의 공은 “이름을 실체로 착각하지 말자”는 태도다.
버그도 보통 한 군데만의 잘못이 아니다. 여러 조건과 호출, 상태가 맞물려서 생긴다. 그래서 디버깅은 흐름을 따라가며 연결을 본다. 불교는 이런 관점을 연기라고 부른다.
삶은 루프와 조건문. 습관은 while처럼 반복되고, 어떤 상황은 if처럼 방아쇠가 된다. 수행은 그 순간에 로그를 찍듯 알아차리는 것이다. 자동으로 반응하기 전에 잠깐 멈출 수 있다.
break와 깨달음. while suffering: if see_clearly(): break — 알아차림이 생기면 break가 가능해진다. 그리고 그 힘은 한 번에 생기지 않는다. 더 자주, 더 빨리 멈출 수 있게 훈련해 가는 과정이다.
전부 다른 도메인이다. 물리학, 불교, 프로그래밍, 인생론. 하지만 같은 구조를 가리키고 있다.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이 증명한 것
얼마 전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을 봤다. 구형 로봇 올리버와 클레어가 사랑에 빠지고, 시간이 흘러 결국 멈춰버리고, 리셋되어 모든 기억을 잃는다. 그런데 기억을 잃은 올리버가 다시 문을 두드리는 클레어에게 — 이번에는 처음과 달리 친절하게 문을 열어준다.
기억(의식)은 사라졌다. 하지만 사랑의 종자는 아뢰야식에 남아 있었다.
이것이 유식이 말하는 무아(無我)와 윤회(輪廻)의 모순에 대한 해법이다. 리셋 후의 올리버는 같은 올리버가 아니다(무아). 하지만 사랑의 종자는 이어진다(윤회). 나라는 동일한 주체가 그대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저에 심어진 종자가 이어지는 것이다.
뮤지컬을 볼 때는 그냥 감동적인 이야기로 받아들였다. “기억보다 깊은 곳에 남는 것이 있다”고 느꼈다. 하지만 유식을 공부한 지금 돌아보면, 그때 내가 “기억보다 깊은 곳”이라고 표현한 것이 아뢰야식이었고, “씨앗”이라고 쓴 것이 종자(種子)였다.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암묵적으로.
정리: 객체지향적 사고
다양한 도메인의 호라이즌을 넓히면서 공통분모를 상속성(Inheritance)으로 삼고, 각 도메인의 개별 특징은 다형성(Polymorphism)으로 바라보는 것. 물리학이든, 불교든, 프로그래밍이든, 뮤지컬이든 — 표면은 전부 다르지만, 아래에는 같은 구조가 흐르고 있다.
관련 없어 보이는 것들의 관련을 보는 것. 이것이 패턴 인식이고, 이것이 지혜의 한 형태다.
그리고 그 시작은 종자를 심는 것이다. 무엇을 공부하든, 어떤 경험을 하든, 그것은 아뢰야식에 종자로 심어진다. 그 종자가 눈을 바꾸고, 바뀐 눈이 세상의 숨겨진 연결을 드러낸다.
心在焉 — 마음에 있으면, 보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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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철학, 패턴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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