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말,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을 봤다. 올리버와 클레어. 두 헬퍼봇 로봇이 주인공인 이야기다. 구형 모델이 되어 주인들에게 버려진 채 아파트에서 홀로 살아가던 그들이 서로 만나 사랑에 빠진다.

로봇에게도 사랑이 가능한가? 뮤지컬은 이 질문에 “어쩌면”이라고 답한다.

확신할 수 없어도

올리버는 안다. 자신이 기계라는 것을. 부품이 낡아가고 있다는 것을. 언젠가는 멈춰버릴 것이라는 것을. 클레어도 마찬가지다. 이미 한 번 주인에게 버려진 경험이 있다.

모든 것은 변하고 사라진다. 영원한 것은 없다. 이것을 아는데도, 아니 어쩌면 이것을 알기 때문에, 그들은 사랑하기로 선택한다.

“괜찮을까요?” 클레어가 묻는다.
“어쩌면요.” 올리버가 답한다.

확신할 수 없다. 보장할 수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순간, 함께 있기로 한다.

깊은 곳에 새겨진 것

뮤지컬의 마지막 장면이 인상 깊다. 시간이 흐르고, 두 로봇은 결국 멈춰버린다. 그리고 다시 시작된다. 리셋되어, 기억을 잃은 채로.

다시 이전처럼 하루하루를 보내는 올리버. 그리고 또다시 충전기가 고장났다며 문을 두드리는 클레어.

첫 만남과 똑같은 상황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올리버는 처음과 달리 친절하게 문을 열어준다. 기억은 없지만, 의식 깊은 곳 어딘가에 흔적이 남아있는 것처럼.

“괜찮을까요?” 클레어가 또다시 묻는다.
“어쩌면요.” 올리버가 또다시 답한다.

극은 그렇게 열린 결말로 끝난다. 다시 사랑하게 될까? 다시 아파하게 될까? 모른다. 하지만 다시 시도해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뮤지컬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명확하다.

모든 것은 변하고 사라진다. 확실한 것은 없다. 영원한 것도 없다. 기억조차 사라질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사랑하지 않을 이유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무상하기 때문에, 지금이 더 소중하다. 사라질 것을 알기 때문에, 이 순간의 연결이 더 절실하다.

“어쩌면”이라는 대답 속에는 불확실성이 있지만, 동시에 희망도 있다. 확신할 수 없지만 가능성은 열려있다. 보장할 수 없지만 시도해볼 수 있다.

반복되는 순환 속에서

우리 인생도 어쩌면 그런 것 같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새로운 하루가 시작된다. 어제와 비슷한 일상이 반복된다. 하지만 완전히 똑같지는 않다.

실패해도 다시 시도한다. 상처받아도 다시 사랑한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선다.

왜?

우리가 누군가에게 베풀었던 친절, 나눴던 사랑, 보여줬던 진실함이 깊은 곳에 남기 때문이다.

표면의 기억은 사라져도, 그 태도의 흔적은 계속된다. 올리버가 기억을 잃고도 이번엔 친절하게 문을 열어준 것처럼.

그래서 모든 순간을 진실되게 대해야 한다. 그 진실함이, 바로 다음 순환을 만드는 씨앗이 되니까.

지금, 이 순간

뮤지컬을 보고 나오면서, 문득 깨달았다.

중요한 것은 “괜찮을까요?”에 대한 확실한 답이 아니라는 것을. “어쩌면요”라는 불확실한 답 속에서도 문을 열어주는 그 선택이라는 것을.

영원을 약속할 수 없어도, 지금 이 순간 함께 있을 수 있다.
기억이 사라질 수 있어도, 지금 이 순간 서로를 느낄 수 있다.
확신할 수 없어도, 지금 이 순간 사랑할 수 있다.

로봇이든 인간이든, AI든 생명체든, 본질은 같다.

모든 것이 변하고 사라지는 걸 알면서도, 사랑하는 것.
확실하지 않아도, 함께하는 것.
그리고 매 순간을, 진심으로 대하는 것.

왜냐하면 그 진심이 기억보다 깊은 곳에 남아, 언젠가 다시 문을 두드리게 하고, 다시 문을 열게 하니까.

어쩌면, 그것이 해피엔딩의 진정한 의미일지도 모른다.


2026년 1월 18일